2010-12-05

제목: ‘끝난 이야기’는 없습니다.

2010년 12월 4일 󰠛 영등포산선 회보『응답』 투고
저자: 이재성 (성공회대학교 노동사연구소 연구원, eejjss@hanmail.net)
제목: ‘끝난 이야기’는 없습니다.
노동운동사를 공부해 오면서 점점 더 ‘역사를 연구한다’, ‘역사를 쓴다’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들을 시간의 흐름대로 정리하는 것은 ‘역사’라 하기엔 부족합니다. 아마도 ‘연표’가 되겠지요. 역사적 사실들을 모아 역사적, 학술적 의미를 갖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것이 역사 연구이고, 역사 기술이기 때문에 훨씬 힘이 듭니다. 사실상 ‘연표’라 하더라도 무엇을 항목에 넣고, 빼느냐를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마련입니다만, 그런 곤란함은 역사 연구에 있어서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어쩔 때에는 ‘아, 내가 이렇게 쓸 자격이 있나, 자신이 있나’하는 두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저는 1980년대 인천지역의 민주노조 운동을 주제로 올해 여름에 박사논문을 쓰고 졸업을 했습니다. 선행 연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자료를 모으고, 지역의 노동사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주로 문서로 된 자료들과 책, 기존 논문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합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엔 기존 자료들이 정리 및 연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차례 구술 증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1980년대의 인천은 말 그대로 ‘노동자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활발하게 노동운동을 벌였던 많은 분들이 여전히 인천에서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 덕분에 2002년부터 인천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노동운동이 벌어졌던 현장을 돌아보고, 몇몇 공장에도 들어가 보고, 그 분들이 사시는 집에도 가 보고, 하면서 비로소 1980년대 인천이라는 역사적 시공간이 서서히 제 마음 속에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제 논문에서는 그러한 생생한 ‘공간’의 느낌을 잘 살려내지 못했습니다만 저는 학위논문을 쓰면서 새삼 ‘공간’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인천은 많이 변했습니다. 특히 부평에는 공단지역이 크게 축소가 되고, 대신에 아파트단지가 빽빽하게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천에는 오래된 공장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동일방직, 경동산업, 대한마이크로, 태연물산, 대우자동차 등등이 그 자리에서 역사를 증언하며 서 있었습니다. 책으로, 자료로만 볼 때에는 그런 공장들이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다 똑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각 사례가 별 다를 게 없이 느껴집니다. 그럴 때에는 뭔가 ‘튀는’ 사례에 눈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농성, 폭행사건, 점거, 대규모 공장 등등 극적인 사례가 중요하게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민주노조 운동의 기원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스펙터클’에 집중되어 있을 뿐, 어떻게 그러한 폭발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은 주로 신민당사 농성을 한 YH 노조사건이나, 똥물사건과 속옷시위 등으로 알려진 동일방직 등등이 언급될 뿐입니다. 사실상 ‘속옷시위’가 ‘나체시위’라고 계속 쓰여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다른 수많은 노조의 투쟁사, 일상사는 덜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며 잊혀지고 있습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와 관련해서 살펴보면, 기존 연구들은 주로 1982년 원풍모방과의 결별 문제와, 영등포산선과 인천산선, JOC 등 다른 단체의 차이점 등을 규명하는 데에 주로 관심을 보여 왔습니다. 대부분 연구들에서는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한계, 그리고 당시 노동운동과 연대했던 종교단체 활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198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이야기하는 것이 주된 해석 방식입니다. 특히 영등포산선이 다른 종교단체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민주노조 운동에 개입하여 노동자들의 독자성을 키우지 못했었다고 평가하는 연구들이 많습니다.
저는 1980년대 민주노조 운동을 연구하였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한국 민주노조운동 전체에 대한 해석이 너무 1980년대 급진적 활동가들의 시각을 중심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사회과학과 종교적 신념의 우열을 나누고, 여성과 남성, 경공업과 중공업의 차이를 가르면서 역사적으로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가를 어느 일방이 결정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등포산선에 대한 평가도 너무 일면적이고, 단순화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그 논의들이 과연 영등포산선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일까, 하는 데에 의문이 듭니다.
예를 들어, 조화순 목사님을 인터뷰 할 때였습니다. 약 네 번 정도를 뵙고 오래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인터뷰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신앙적인 의미와 배경을 중요하게 증언하려 하면 대부분의 기자, 연구자들은 실망하는 얼굴을 하며 그런 이야기를 잘 들으려하지 않았다며, 저에게 ‘잘 들어 주어서 고맙다, 후련하다’ 하셨습니다. 사실 제가 목사님의 잘 알려지지 않은 가족사, 감신대 시절, 그리고 신앙 이야기를 이해해 가면서 오래 잘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제가 한 때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구술자의 이야기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구술생애사 연구방법을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조화순 목사님의 긴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산업선교의 본질적인 중요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는 영등포산선의 역사적 평가가 일반 연구자, 신학자, 목회자, 활동가, 노조 지도부, 평조합원 등 다양한 행위 주체들의 협력과 고민 속에서만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선입견과 판단을 잠시 접고, 행위 주체들의 고백과 증언을 통해 역사는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다고 역사가 무조건 행위 주체의 입장에서 ‘잘했다, 최고다’라며 자화자찬하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여러 가지 고민과 반성이 솔직하고 깊게 이루어질 때 그 역사적 의미도 커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서 서두에서 역사 연구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영등포산업선교회가 ‘한국 기독교 사적지’로 선정된 것은 아마도 역사적 평가의 종결이 아니라, 그 출발점이 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 됩니다. ‘역사유적지 지정 감사예배’와 축하마당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영등포산선이 ‘죽은 역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것도 바로 영등포산선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또 그 공간을 통해 널리 전파되어야 함을 역설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동사에 더 연구할 것이 남았느냐고도 합니다만, ‘끝난 이야기’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성문밖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 십자가를 바라보았던 순간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노동사를 연구한다면서도 저는 11월 초에 영등포산선을 처음 방문했고 많이 반성했습니다.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고, 또 그런 만큼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노동사 연구자들도 많이 줄어들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여러 가지 좋은 프로그램을 고안하고 실천하면서, 우리의 노동운동사가 잊혀지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미래를 여는 지혜가 되게 하기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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